
섬유질을 아예 끊었더니 항문 출혈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처음 이 내용을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장 건강에는 식이섬유가 좋다는 말을 수십 년 동안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남편 장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 온 저로서는, 이 내용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습니다.
섬유질은 대장산성화의 원인
남편은 늘 배가 아프고 변이 묽습니다. 처음에는 야채를 열심히 챙겨줬습니다. 섬유질이 장 건강에 좋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억지로 먹여봤자 오래 가지도 않았고, 남편 스스로도 딱히 나아지는 느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방향 자체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핵심은 대장 내 발효 과정에 있습니다. 식이섬유(dietary fiber)란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오는 성분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섬유질이 대장에 도착하면 장내 세균에 의해 발효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발효가 일어나면 젖산 같은 유기산이 생성되면서 대장 내 pH가 급격히 낮아집니다.
여기서 pH란 산성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7이 중성이고 숫자가 낮을수록 산성이 강해집니다. 로그 기반이라 pH 1 차이가 산성도 10배 차이를 의미합니다. 건강한 대장의 pH는 보통 5.5에서 7.5 사이인데, 밀기울이나 귀리 등 섬유질이 많은 식품을 섭취하면 pH가 5 이하로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pH 7 기준으로 보면 산성도가 최대 100배 이상 높아지는 셈입니다.
이렇게 산성화된 환경은 대장 점막 세포를 직접 손상시키고 유익균의 성장을 억제합니다. 장내 미생물 군집(microbiome)이란 대장에 서식하는 수백 종의 세균 집단을 말하는데, 이 균형이 무너지면 염증이 심해집니다. 실제로 과일 다이어트 연구에서 섬유질 발효가 박테로이데스 계열 유익균의 다양성을 크게 줄이고, 건강하지 않은 장 환경의 지표인 프로테오박테리아 비율을 늘렸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장이 안 좋을 때 섬유질 섭취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식이섬유가 대장에서 발효되며 pH를 급격히 낮춰 산성 환경을 만든다
- 대장 내 산성화가 장 점막 세포를 손상시키고 염증을 유발한다
- 섬유질 발효 시 발생하는 수소·이산화탄소·메탄 가스가 대장 내 압력을 높인다
- 콩·통곡물에 포함된 옥살산염은 장 점막 내벽을 추가로 부식시킬 수 있다
저잔사식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이유
저잔사식(low-residue diet)이란 소화 후 대장에 남는 찌꺼기, 즉 잔사를 최소화하는 식이 방법입니다. 쉽게 말해 식이섬유와 저항성 전분 섭취를 극도로 줄여 대장에 내려오는 음식물 양 자체를 줄이는 방식입니다.
저항성 전분(resistant starch)이란 일반 전분과 달리 소장에서 소화·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내려오는 전분으로, 식이섬유와 유사하게 대장 발효를 유발합니다. 현미나 콩류에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들어 있으니 장이 안 좋은 분들에게는 말 그대로 이중 부담이 됩니다.
크론병이나 궤양성 대장염 등 염증성 장 질환(IBD, Inflammatory Bowel Disease) 환자에게 무섬유질 액체 포뮬러를 약 8주 동안 투여하는 완전 경장 영양법을 사용하면 약 70~80%에서 관해, 즉 증상 소실이 유도된다는 임상 데이터가 있습니다. 여기서 관해란 질병 증상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포뮬러에는 식이섬유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치료 성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대장에 아무것도 안 내려오게 했더니 장이 회복된 겁니다.
대한소화기학회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IBS) 식이 가이드라인에서도 식이섬유와 저항성 전분 섭취를 최대한 제한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출처: 대한소화기학회). 서울아산병원 크론병 식단 역시 저섬유소 식단을 기본으로 권장하고 있고요.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잡곡밥을 흰쌀밥으로만 바꿨는데도 남편이 속이 한결 편하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현미의 저항성 전분과 식이섬유가 고스란히 대장까지 내려가던 것이 줄어들었으니까요.
피해야할 음식
솔직히 이건 예상 밖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저는 혈당 관리가 필요해서 통곡물을 챙겨 먹어야 하는 상황이고, 남편은 반대로 섬유질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한 식탁에서 반찬을 따로 차리려면 손이 두 배로 갑니다.
지금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단백질 반찬은 같이 먹고, 밥과 일부 채소 반찬만 따로 합니다. 남편은 흰쌀밥에 계란, 생선, 고기 위주로 먹고, 저는 잡곡밥에 채소 반찬을 따로 챙기는 방식입니다. 고기와 생선은 소장에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대장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육류가 대장에서 부패한다는 말은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유산균 제제도 한동안 먹여봤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식단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별 효과를 못 봤습니다. 대장 내 환경이 산성화된 상태에서 유익균을 넣어봤자 그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근본 원인인 식이섬유 과잉을 해결하지 않으면 유산균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나 장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라면 아래 식품군부터 우선 줄여보시길 권합니다.
- 모든 콩류(두부, 두유, 된장 포함)
- 현미, 보리, 귀리 등 통곡물
- 생채소(특히 양배추, 브로콜리, 양파)
- 사과, 배 등 섬유질이 많은 과일
1975년 월터 보그틀린 박사가 저탄수화물 무섬유질 식단으로 662명의 소화기 질환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사례를 기록했지만, 이 연구는 당시 주류 의학계에서 외면당했습니다(출처: PubMed). 50년이 지난 지금도 대장 건강에 섬유질이 필수라는 말이 여전히 주류입니다. 하지만 장 질환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실제로 처방하는 식단은 저잔사식입니다. 이 간극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남편 장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잡곡을 흰쌀밥으로 바꾸고 야채를 강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보다 훨씬 편해졌다고 합니다. 다음 달부터는 한 달 단위 식단표를 만들어 더 체계적으로 관리해볼 생각입니다. 장이 오래 안 좋으셨다면, 무작정 섬유질을 늘리기보다 잠시 줄여보는 방향을 시도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 조언이 아닙니다. 장 질환이 의심되시면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